2019년 4월 15 일 노틀담 성당. 보수 공사 중이었던 성당의 내부에서 큰 불이 지붕과 첨탑에 발생해 붕괴하는 사건이 있었다. 화재 현장의 모습은 미디어를 통해 보도되었고 프랑스인들은 물론 남의 나라, 남의 유산이 불타는 모습을 지켜보는 세계인들에게도 그 충격이 전해졌다. 특히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국보 1호의 숭례문이 누군가의 방화로 불타는 모습을 지켜본 한국인에게는 그 당시에 느꼈던 트라우마가 다시 복기되었을 것이다. 현재의 숭례문은 이미 복구되어 그전의 사건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도록 새것(?)의 느낌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그것이 예전의 것과 닮아있기 위해서 전통적 건축의 측조방식에서부터 단청의 색 하나하나까지 고려하는 등 그 디테일을 복원하기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고 하더라도 복구되어 돌아온 자리는 어딘지 모르게 우리를 살짝 빗겨가 있다. 낯설다.
나의 작업적 영감은 현상을 바라보는 이성적 기관과 감성적 기관에 기인하는 낯설은 관계성으로 부터이다. 이는 내가 작업을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키네틱 작업의 특성상 수리적 과정을 기반하고 있다. 머신 디자인에서부터 출발하여 모터의 동작과 관련된 메카닉 제어, 숫자로 비롯된 변환값과 그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수치와 측량을 바탕으로한 이성적 사고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Decoders의 기계적 구조와 설계, 렌티큘러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내기위해 레이어를 자르고 편집하는 기술적인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감성적 기관은 모든 작업의 결과물을 재조립하기 위한 선택에 집중된다. ‘어떠하게 동작한다’고 정해진 수많은 변환의 값이 사실 기능적인 측면보다도 감성적인 부분에 와 닿도록 결정짓는 과정이다. 여타의 미디어 작업이 그렇듯 이 부분이 바로 기술적 측면, 기능적 측면을 예술의 영역으로 옮겨놓는 과정이라 보면 되겠다. Decoders의 패널을 위해 분석했던 노틀담의 남쪽 스테인드 글라스의 색채 데이터를 다시 작품의 영역으로 넣기 위해 선택하는 것, 패턴의 움직임을 선별하는 것, 빛의 밝기와 색감을 선택하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내가 작업을 통해 많은 일을 할애한 부분이 원본 이미지를 새로운 단위로 해체하여 데이터화 하는 것이다. 이 데이터는 그 원류가 아무리 원본에서 왔다고 하더라도 개별적으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여기에 더해 의식적으로 쪼개진 이미지에 새로운 색상, 사운드와 새로운 변환이미지의 다른 정보를 이입한다. 그것이 어떠한 기능적 측면이 첨가되건 간에 그것 역시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의미있는 것은 재조립 과정이다. 원본이 갖는 이미지에서 나온 이미지 조각들을 임의의 변환값이 더해진 상태에 원래의 자리로 돌려 전체의 이미지를 복구하는 것이다. 당연히 원본과는 다르다. 이미 해체의 과정을 거치고 돌아온 자리에는 과거의 네러티브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현재 상황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런 낯설음의 관계설정은 저번 전시에서 이벤트의 트리거로 사용된 놋그릇인 Singing Bowl을 통해 더욱 분명해 진다. 이는 많은 종교에서 제의적인 도구로 사용되는 것으로 현재의 이벤트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리되로 연속되는 것이 아닌 개별적 상황이 전개됨을 듣는 이로 하여금 확인시키는 역할로 사용되었다. 지난 전시에서 사용되었던 Singing Bowl 또한 비슷한 맥락을 갖는다. 현재의 이벤트를 분명히 과거의 시간과 구분짓는 것, 현재의 이벤트에 충실할 것을 말하고 있다.
나의 작업은 변화와 전환, 새로운 관계맺음을 거쳐 다시 회귀로의 결론을 갖는다. 이 회귀는 완벽한 현재 시간성의 회복일까? 아님 또다른 현재의 재시작일까? 현재에 대한 재인식은 지금을 낯설게 보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의 파도가 우리를 y축의 위아래로 이동시키는 것 같지만, 우리는 안다. 우리가 돌아온 자리는 그 이전과 다름을. 이는 나의 작업의 주요 테마이며 관객과 공간이 일차원적인 방식으로 관계됨을 피하고, 계속해서 낯설음의 공간, 경계의 공간에 속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 낯설은 인식의 교란이 관객 자신의 존재와 그 경계 영역에대한 또 다른 질문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